항해 노트를 만지작거리며

작년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외의 배, 의외의 바다 환경에서 좌충우돌하며 고생이 많았습니다. 타 본 적 없는 스타일의 세일링 요트에 올라 태평양이라는 바다에서 처음 항해한 작년에 이야기가 가장 많았을 줄 알았죠.

이번엔, 나름 준비된 상태에서, 이젠 익숙해진 배, 작년 이미 겪어 본 바다 환경에서 새로운 이야기거리가 많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뭐든 처음이 신기하지 그 다음은 익숙해지게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고작 밴쿠버에서 아스토리아까지의 짧은 구간을 항해했던 작년 이야기를 묶어서 책으로 내기도 했어요.

먼 기억이 더 희미해서일까요? 두 번째 항해에서 돌아오니 고작 작년 항해 정도로 책까지 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드는군요. 그 땐 처음이고 모르는 게 많아 어려웠다면, 이번 항해는 그 자체로 진정 빡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있게 시작했지만 점차 불확실성과 공포 앞에서 스스로의 멘탈과 1:1 면담을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도 2구간 도착지를 멕시코 엔세나다Ensenada가 아니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당긴 것도, 80년만의 허리케인 힐러리의 영향도 있었지만, 더이상 항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예요. 저는 세일링 요트로 고난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하고 기록을 세우고 하는 것보다는 즐겁게 바람과 바다와 노는 편을 더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필명도 이지세일링(easysailing)….

제 취향 세일링 요트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항해,
처음엔 몰라서 초대에 응했고,
상황 파악을 한 뒤엔 도망 갈 구멍이 없었기에 고군분투 했고,
그러다 생긴 사명감 비슷한 것 때문에 겨울-봄 백수로 놀고 여름이 되자 항해를 계속하기 위해 배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뭐 그 빈 시간 덕에 태어나 처음으로 책이라는 것도 내 봤지만요. (원래 귀양 가서 책 쓰는 거라고…)

이제 11월 말 배로 돌아가 최종 목적지인 바하 캘리포니아의 끝, 카보 산 루카스(Cabo San Lucas)까지 항해를 시작하기 전, 이번 구간의 항해를 다시 돌아보려고 합니다. 중간중간 시간이 날 때마다 항해 중에도 기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할 수 있었던 건 조그만 항해 수첩의 메모 뿐이네요.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감정들을 겪었기에 항해 초기의 노트를 보니 이조차도 전생의 일처럼 아득합니다.

다른것 보다 여행기를 쓰기 시작하면 책상 위에서 다시 한번 그 항해를 반복하게 될 텐데 좀 엄두가 안 나기도 합니다. 그래도 11월에 돌아가 다시 항해를 재개하려면 해야겠죠? 세 번째 구간은 이 거부감과 공포를 극복하고 좀 즐거운 항해를 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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